헤르베르트 오토 길레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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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. 개요[편집]
나치 독일의 슈츠슈타펠 무장친위대 대장
2. 초기 행적[편집]
독일 제국령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의 간델스하임에서 공장경영인의 아들로 태어난 길레는 1909년에 벤스부르크의 프로이센 왕국군 사관학교에 입학해 공부한 후 1914년에 베를린의 프로이센 왕국 고급유년사관학교로 이적했다.
3. 제1차 세계 대전[편집]
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1914년 8월에 바덴 대공국군의 야전포병연대 사관후보생으로 참전한 그는 1915년 1월에 소위로 승진해 1,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. 제1차 세계 대전 후 1919년 3월에 제대한 길레는 1929년까지 각지의 농장에서 토지관리인으로 일하면서 철모단에 가입했다.
4. 나치당 입당과 슈츠슈타펠 입대[편집]
1929년부터 1933년까지 브라운슈바이크에서 자동차 회사의 회사원으로 일한 길레는 1931년 5월 1일에 나치당에 입당해 12월에 친위대에 입대했다. 1933년 4월 20일에 친위대 소위로 임관 후 1934년 5월 29일에 무장친위대의 전신인 친위대 특무부대에 소속된 길레는 처음에는 제1연대 <도이칠란드>에 소속되었지만 1936년 10월에 대위계급으로 제2연대 <게르마니아>로 이적했다. 1935년 1월 3일에 조피 샤를로타 멘네케와 결혼한 길레는 딸 하나를 슬하에 두었다.
5. 제2차 세계 대전[편집]
친위대 소령계급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을 맞이한 길레는 폴란드 침공과 서부전선에서 <게르마니아> 제1 포병대대의 대대장으로 참전했다. 1940년에 펠릭스 슈타이너의 눈에 발탁된 그는 제5 SS 기갑사단 <비킹>의 포병연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동부전선에서 분전하여 1942년 10월에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고 11월에 친위대 소장으로 승진했다. 1943년 5월부터 1944년 8월에 비킹의 사단장이 된 길레는 소련군을 상대로 분전하여 이름을 떨쳤는데 1944년 1월부터 2월에 코르순-체르카시 포위전에서 비킹을 포함한 6개의 사단들이 소련군에게 포위되자 비킹 사단이 결사의 탈출작전을 벌여 길을 여는데 성공하기도 했었다.[1]1944년 8월부터 제3 SS 기갑사단 <토텐코프>도 산하에 두어 제4 SS 기갑군단 사령관이 된 길레는 바르샤바 공방전과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구출작전을 지휘했다.
1944년 11월 9일 최종적으로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, 무장친위대 대장으로 승진했다. 하지만 작전은 실패하여 군단은 거의 괴멸되고 말았는데 그 후 독일의 패전이 다가오자 길레는 소련군에서 벗어나 연합군의 포로가 되기로 결심하여 남은 군단병력들에게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게했다. 5월에 길레와 그의 군단병력은 오스트리아에서 미군의 포로가 되었다.
6. 전후 행적[편집]
길레는 3년간 미군에게 억류된 후 1948년 5월에 석방되었다. 그 후 서독의 신문사에서 일하면서 서점을 경영하며 생계를 유지했는데 퇴역군인을 위한 잡지인 <Wiking Ruf>도 편집했었다. 길레는 1966년에 심근경색으로 하노버에서 사망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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